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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필요하지?

사괏 2018. 7. 20. 15:52

패러독스 픽 한 페이지를 백 번씩 소리 내어 읽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오래 음미하고 푹 잠겨 있고 싶은데 눈으로 읽거나 오디오픽으로 듣는 건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근데 백 번 읽고 있으면 탕 속에 오랫동안 느긋하게 몸 담그고 있듯이 흡족하게 셜록에 대해 이것저것 오래 생각할 수 있다. 




존이 보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은 완전히 깬 모습이다. 어두운 금발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고 약간 빠르게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셜록의 허벅지를 짚고 또 한 손으로는 곱슬머리가 뭉개진 셜록의 머리를 감싼다. 존이 살아있다. 나이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은 얼굴이지만 그런 존은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세탁이 끝난 직후 잔뜩 구겨진, 따뜻한 온기를 품은 옷더미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서 가슴 한구석이 아파올 때처럼 말이다. 


There is John. He's wide-eyed and by now entirely awake, his dark blond hair all mussed and his breathing slightly quickened, up on his knees, one hand on Sherlock's thigh and the other gripping the side of his dark head where the curls are scattered helter-skelter. He's alive, and he has a far more weathered face than anyone his age ought, and he looks absolutely beautiful, the way perfectly clean and warm wrinkled laundry all in a pile looks so beautiful it hurts sometimes. 


'New days to throw your chains away', part 6 of The Paradox Series

by wordstrings

번역 애루

그리고 이런 문장들은 베껴 적어 놓고 그걸 자주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찬다. 셜록이 씹어 먹거나 푹 고아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드라마건 픽이건 그냥 보고 읽기만 하는 건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스스로도 진짜 유난이다 싶지만 셜록에 대해서는 채워지지 않은 이상한 허기와 갈증이 항상 있다. 근데 좋지 뭐, 질리지도 않으니 즐겁게 영어공부도 하고. 


암튼 그래서 시즌1 초반의 얘기를 보고 있는데 읽다 보니 아직 존과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셜록에게 있어 유존무존의 차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애루님이 후기에도 쓰셨듯 존을 만나기 전의 셜록은 야드에 기웃거려 쿠사리 얻어먹으며 사건 해결하고 런던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니다 221b에 돌아와 실험이나 하며 자기가 외로운 줄도 모른 채 계속 살았겠지. 공허함과 쓸쓸함을 느끼던 101 초반의 존보다 아예 자신의 외로움을 자각조차 못 했던 셜록이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셜록이 몸만 자란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인 것 같다. 


그래서 존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얼매나 좋은지. 할머니처럼 같은 얘기 하고 또 하면서 할 때마다 똑같은 기쁨과 안도감, 흐뭇함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진짜 좋으니까. 


보스웰 아니고 보모존


이런 사랑, 행복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알고 난 후에도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로는 쎈 척 하고 무시하고 부정하고 철벽치며 오오오오랜 입덕 부정기를 거친 셜록. 그 시간 동안 차근차근 함락당해 이제는 완전히 백기투항하고서 받아들인 사랑의 맛이 어떠냐. 없이는 못 살겠지?